개자추와 여러 충신들의 보좌로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거친 후 국민들의 내응과 진 나라의 협조하에 중이는 마침내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수레가 막 도읍에 도착할 무렵 중이는 그동안 망명생활에서 줄곧 자기와 함께 해왔던 낡은 돋자리를 집어던졌다. 그러자 개자추는 그 돋자리를 주어들고 남몰래 고향인 하현 배개 촌에 가서 노모를 공양했다. 중이는 온갖 고생끝에 국왕이 되고 중국 역사상 이름난 춘추시대 다섯 패왕의 하나인 진문공 이 되었다. 진문공은 정권을 잡은 후 대신들에게 봉작을 내려 자기를 따랐던 공신들에게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을 내리면서도 개자추만은 가맣게 잊고 있었다. 한 대신이 그것을 일깨워 주어서야 진문공은 잘못을 깨닫고 몹시 후회하였다. 개자추에게 미안함을 느낀 진문공은 전국에 영을 내려 개자추를 찾게 하였고 벼슬살이를 원치않은 개자추는 노모와 함께 풍경이 수려한 면산의 한 바위 굴속에 은거하여 누추한 옷과 찬밥으로 살아갔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된 진문공은 몸소 대신들을 이끌고 면산을 찾아왔다. 면산기슭에 이른 진문공 일행은 사람를 산 위로 파견하여 힘껏 소리쳐 불렀으나 골짜기에 메아리만 울릴뿐 개자추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개자추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진문공은 개자추가 효자임을 생각하고 만약 면산에다 불을 지르면 개자추가 노모를 살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노모를 업고 밖으로 나올 것이라 여겼다. 그 결과 큰 불이 여러 날 산을 태웠지만 개자추의 종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진문공이 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개자추 모자의 유해나 물품은 전혀 눈에 띄이지 않았다. 나중에 누군가가 산허리의 한 바위 굴속에서 반마나 해진 돋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진문공이 돋자리를 받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할육봉군은 충성을 다함이오니 주공께서 청명하시기를 바랄 뿐이오며, 신은 저승에서도 후회함이 없사오니 부디 근정으로 다시 청명함을 보여 주옵서소. 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진문공은 보고나서 자책감과 비통함에 시달렸고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곧 영을 내려 면산을 개 산으로 고치고 산언덕 하나를 개자추의 봉작지로 삼아 개공령 이라 명명하였으며 개자추 모자가 은거했던 바위 굴을 개공사로 개건하고 또한 면산 기슭 백구 촌 남쪽에 있는 측백나무숲 속에다 개묘를 세웠다. 그리고 또 영을 내려 정양 현을 개휴 현으로 개칭했다. 그는 또 수행인들에게 타다남은 나무를 몇 조각 가져나 자기가 신을 나막신을 만들게 했다. 그는 매일 조회에 나갈 때마다 그 나막신을 신고 궁전안을 걸으면서 딸각딸각하는 소리에 자연히 발아래를 굽어보게 되어 마치 개자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가장 충성스럽고 존경하는 친구를 호칭할 때면 족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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