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산 은 불교역사가 유구하고 문화온축이 두터워 중국 불교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천하의 명산에는 중이 많듯이 백마사 가 제일 먼저 평지에 건조된 사원이라면 면산의 철와사 는 가장 일찍이 높은 산에 건조된 사원으로 한 대 건안년간에 건조되어 백마사보다 100여 년 뒤졌을 뿐이다. 면산의 포복사 는 조위 태화 년간에 건조되었다. 면산 <대당빈주포복사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원은 조위 태화년간의 고승 적공 이 고찰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위 명제가 칙명으로 사찰을 건설케 하고 또한 이름을 포복사라고 하였는데 거금 1,8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포복사는 길이 180m, 높이 60m, 깊이 50m의 천연 동굴속에 자리해 있는데 상하 두 층으로 니뉘어 굴속에 굴이 있고 바위속에 바위가 있으며 200여 간의 선방과 1~2만 명의 유람객이 들어가도 비좁지 않은 공간을 보유하고 있어 국내에서 유일하게 현암 종유동 속에 자리한 불교고찰이다. 면산 불교의 독특한 점은 정 도 있고 선 도 있어 정과 선을 동시에 수련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오랜 흐름속에서 불교의 두 역사 인물은 면산 불교 발전의 이정표로 된다. 그중 하나는 정토종 조사인 담란 이다. 당 대 <속고승전ㆍ담란전>의 기록과 고증에 따르면 담란대사는 오대산에서 <대집경>에 주해하던 중 과로로 병이 들어 사처로 의원을 찾아다녔고 빈주의 태릉 에 이르러 문뜩 천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고는 공왕불의 교화를 받아 면산 포복사로 오게 되었다. 수행동 에서 폐관양기한 보람으로 <복기법)>ㆍ<조기론>ㆍ<요백병잡환방> 등 양생치료법 여러 권을 파악하게 되었다. 후에 난량 에서 뤄양 에 돌아온 그는 보살 유지 를 만나 전문 정토를 수행하고나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위 나라 군주는 그에게 신란이란 호를 내리고 어명으로 병주 대암사, 즉 면산 포암사에 거주케 하였다. 그후 10여 년 동안에 담란은 연이어 <주왕생론> 2권ㆍ<찬아미타불게> 1권ㆍ<약론안락정토의> 1권을 집필하였다. 당시 담란을 스승으로 모시는 문하의 승려와 신도들이 너무 많아 포복사로서는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담란은 하루 밤 사이에 맞은 편 산으로 날아가 철불사를 창설하고 강경대를 개설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난공암이라고 불렀다. 이 기간에 그는 늘 린펀 과 제슈 사이를 오가며 석벽 현중사 정토를 고양하였다. 낙위 흥화 4년에 담란은 이 사찰의 수행동에서 원적하였고 제자들에 의해 포소 되었으나 후에 전란에 훼손되었다. 회람사의 주지 혜진 이 상주하자 희종은 어명으로 사리탑을 세워 새로 금신을 소조케 하였다. 현재 포복사안에는 담란조사의 수행동이 있고 수행동 앞에 명대의 <담란수행기>비와 명인들의 유기비 여러 개가 있으며 담란의 금신상은 정과사 대전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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