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림종 은 제슈시 성문밖 궈쟈 마을 사람이다. 곽림종은 동한 의 순제 영건 3년(서기 128년)에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그는 가난한 집 출신이었으나 가슴속에 큰 뜻을 품고 어려서부터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에 근면하였으며 박식하고 총명하여 세상사를 통찰하고 교제가 넓어 점차 당시 수만명 태학생의 수령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품행이 단정하고 간곳마다에서 인의도덕을 봉행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유도라 불렀고 그는 유도 두 글자를 자기의 호 로 삼았다. 서울인 뤄양 에서 유학할 당시 동정심이 강한 곽림종은 뒤떨어진 인사들을 많이 이끌어주고 도와주었으며 설사 이른바 불인 한 사람일지라도 힘이 자라는 만큼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선비들 가운데서도 명망이 매우 높은 수령이었다. 그는 천성이 정직하고 권세를 탐하지 않으며 부패를 몹시 미워했고 세 차례나 관청의 징용을 거절하여 팔고의 하나로 불리었다.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그가 나중에 뤄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 수천명의 사대부 들이 몰려나와 그를 황하기슭에까지 전송했다. 곽림종은 고향에서 학문을 가르치며 관록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여 제자만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서기 169년 초봄 한 영제가 영을 내려 유명 인사 100여 명을 살해하고 태학생 1천여 명을 체포하였다. 많은 유명 인사와 군자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비통한 나머지 몸져 눕게 되었고 임종에 그는 제자들에게 한 나라 세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흉보가 전해지자 사방에서 문인과 학사들이 찾아와 무려 1천여 명이 영구를 전송했다. 곽림종은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선명한 정치 및 사상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리에 담백하였고 사학을 세워 덕으로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가르친 제자가 수천여 명에 달하여 이른바 천하에 제자들이 널려 있었다. 몇만 명 태학생의 수령이며 이름난 교육가로서의 그는 노모에게 효도하고 권세를 탐하지 않고 근검소박하였으니 충효를 겸비한 문화명인으로 손색이 없다. 문언박 은 북송 의 유명한 재상과 군사 대신이며 제슈시 성문밖 원쟈좡 사람으로 송대 진종 경덕 3년(서기 1006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매우 총명하였다. 한번은 아이들끼리 공을 가지고 놀다가 한 아이가 잘못하여 공이 그만 큰 나무의 빈 구멍속에 빠져 들어가자 그는 물통을 가져다 나무구멍에 물을 부어 공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문언박이 물을 부어 공을 꺼낸 이야기는 사마광 이 독을 까부신 이야기와 어깨를 겨루는, 아이들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로 국가우정국에서 아동소재의 우표 <문언박관수취구>를 발행한 바 있다. 문언박은 북송시기의 정치가로서 저서 <노공집> 40권이 있으며 4명 황제(인종ㆍ영종ㆍ신종ㆍ철종)의 재상이었고 장군과 재상으로 50여 년을 지냈으므로 노국공 의 봉작을 누리었다. 문언박은 일에 부닥치면 침착하고 냉정하였고 일처리에 매우 과감하였으며 또한 많이는 사직과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그는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여 군대를 정예화하고 행정기구를 간소화하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제의하였으며 북송의 사회적 안정과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국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4왕조의 원노인 문언박은 국내외에 명성과 덕망이 매우 높았다. 서기 1090년에 노령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097년 92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떴다. 충효문화가 제슈에서 형성된 것은 공로를 세우고도 면산에 은거한 개자추, 동한의 경성에서 이름을 떨친 곽림종, 북송 4왕조의 원로인 유명 재상 문언박, 그리고 송창ㆍ장훤ㆍ양석여ㆍ송정괴 등 학사와 명인들 외에 또 당 대의 고승이며 면산의 활불 인 전지초, 공왕불이라고도 함)가 있다. 수행을 위해 면산기슭에 이른 전지초 활불은 항상 지쟈좡 일대의 농민들을 위해 밀가을, 제초, 시비 등 농사일에 발벗고 나섰고 마을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지초를 선우 라고 하였으며 오늘까지도 면산일대의 사람들은 전지초를 전선우라고 부른다. 전지초는 면산의 포복암에다 운봉사 를 창설한 후로 항상 서민들을 위해 가물이 들면 고승 은공ㆍ마사 미 오룡 등 제자들을 시켜 구름을 불러오고 비를 내리게 하였다. 당 정관 12년 800리 진천에 큰 가물이 들어 당왕 이세민이 대신들을 이끌고 면산에 가서 활불을 배알하고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산을 내려 회란사 에 휴식을 하고 있을 때 진천일대에 큰 비가 쏟아져내렸다. 이에 이세민은 전지초를 공왕불이라고 칭송했다. 이로부터 공왕불이란 미명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전선우의 선행은 진중 일대의 백성들 마음속에 명기되어 있다. 제슈시 민영 기업가이며 산시 성 싼쟈 석탄화학유한공사 이사장 겸 총경리인 옌지잉 선생은 제슈의 경제를 진흥키 위해 기업의 실직자와 면산 부근 농촌의 1,000여 명 잉여노동력의 취업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1995년 10월 이래 면산풍경명승구 개발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10리 절벽 위에다 고찰을 보수하고 인문과 자연생태풍경구를 새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운봉사 서쪽 뜨락의 개추전을 개건하고 용척령 에다 개자추 모자 조각상을 세우고 개공묘의 신도와 개공사 석굴을 수선하였으며 또한 아이하오 비탈에다 1,800여 개 돌층계의 등산길과 비림원을 축조했다. 옌지잉 선생의 기획하에 대도 면산ㆍ문화면산ㆍ선경면산ㆍ금수 면산ㆍ명승면산ㆍ생태면산을 형성하여 면산을 캐리어로 하고 개자추를 영혼으로 하는 충효문화를 널리 고양하였다. 10여 년의 개발과 건설을 통해 이 역사 문화 명산은 이미 북방지구에서 사시장철 유람할 수 있는 중요한 풍경명승구로 되었고 수천 수만 사람들이 개자추를 추모하고 옛 성현들을 탐방하며 고적을 찾고 신선과 부처를 배알하며 등산과 답청을 하면서 충효문화를 감지하는 관광휴양지로 부상했다. 산시 성 제슈시의 중신과 명사들로 충효문화가 형성되고 인간선경과 천당풍경의 대도면산은 충효문화를 길러냈으며 충효문화는 면산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되었다. 이는 제슈, 나아가 산시성 국민들의 자랑이며 또한 중화민족의 자랑이기도 하다. |